회개는 쉬워요 백번도 넘게 해봤어요 나는 (2024)

영화 범죄의 재구성 중에 아주 역설적인 대화가 나옵니다.

한 범죄자가 병실에서 기침을 합니다

형사가 그 모습을 보며 질문합니다.

​형사: 너 마약끊었다면서 언제 다시 시작했어?

범죄자: 하 그래서 인생이부조리하다는거 아닙니까

마약끊는거 쉬워요 백번도 넘게 끊어봤어요 나는,,

​회개의 정확한 의미는 죄를 뉘우치고 다시죄를 짓지 않는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시 죄를 범한다면 회개한것이 아니다.

​이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이세상에 과연 하나님앞에 진정 회개한자가 누가 있을까?

진정회개 했다고 말할수있으려면 다시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하기때문이다.

당신이 스무번 서른번 마흔번 백번을 회개했다면

다시 말해 99번의 앞서의 모든 회개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거짓이란 사실이다.

​성도의 성화가 완전한것이 아니고 점진적인것이듯

성도의 죄로부터의 회개는 완전한것이 아니라 점진적인것이다.

더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회개한자라기 보다는 평생을 회개하고 회개하게 될 자인것이다. 성도는 회개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이지 아직 완전히 회개한 사람이라고 볼수는 없다.

생애에서 완전히 성화된 성도가 없듯이 완전히 회개한 성도도 없다는게 진실이다.

만일 성도의 회개 진실성 여부가 죄를 용서받는 조건이 된다면 실제 어떤 성도도 죄를 용서받을길이 없다.

하나님의 용서는 성도의 회개의 진실성에 따라서 허락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것이다.

ㅡㅡㅡㅡ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회개와 자녀가 된 이후의 회개의 차이점을 정리해봅니다.

법적인 용서, 부모로서의 용서

​(정동섭목사님의 글중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할 때,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단번에 영원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히 9: 12).

용서에는 법적인 용서(judicial forgiveness)가 있고

부모로서의 용서(parental forgiveness)가 있다.

법정적 칭의가 있고,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가 있다.

전자의 용서는 끝났으나 후자의 용서는 계속적인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죄인의 신분이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이 사실이나, 성품은 죄인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계속 인격적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구원파의 구원에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로서의 구원이 빠져있다. 구원파는 초대교회를 괴롭히던 영지주의, 도덕폐기론의 부활이다.

박 씨는 회개가 무엇인지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모든 이단들이 정통교회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기성교인들의 체계나 확신을 뒤흔들어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한다. 구원파는 이 죄와 회개 문제를 그렇게 사용한다. 즉 기성교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공격하기 위하여 새벽마다 울고불고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회개란 단어를 구원받은 후에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적용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적 근거는 즉, 회개란 '돌이키다'라는 말로서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 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회개란 오직 구원을 위해 돌이키는 행위로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준 죄를 또 다시 사해 달라고 울고불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요, 결국 울고불고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백날 울고불고 회개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정죄해 버리는 것이 박옥수 구원파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박옥수는 칭의를 위한 단회적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서의 회개와 일생 동안 계속되어야 하는 회개를 구분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전체가 회개의 삶이다( The Christian life in its totality is a life of repentance).

본질적으로 구원을 위한 회개든(히 6:1∼2), 성화를 위한 회개든(계시록 3; 시편 51:14, 삼하 24:10, 마 6:12, 요일 1:8∼9 등), 용서하고 용서받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단회적인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에서는 제1단순과거 형태를 사용한 것이다.

비록 구원을 위한 회개는 단회적인 것이지만 혹 믿음이 없어서 반복적으로 한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받지 못한 증거는 결코 아닌 것이다. 단지 반복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더욱이 구원받은 후에도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우리로서는 날마다 성화를 위한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골 2:6∼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은 신자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은 상태에서 떨어질 수 없으며,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the justified)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해서 용서하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계속해서 그들의 죄(sins)를 하나님께 고백하여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정동섭목사님의 글중에서)ㅡㅡㅡ

회개는 죄를 용서받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회개를 하나님과 죄용서를 거래하는 상품으로 생각합니다.

​회개의 딜레마가 이점입니다 회개가 용서의 조건이라고 생각할때엔 이미 진정한 회개가 아니게 된다는 점입니다.

웨스턴 민스터 신앙고백은 회개를 정의할때

​회개하지 않는자가 죄를 용서받을수는 없지만 회개가 용서의 조건이 아니라는점을 애기합니다.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두 명제 모두 다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와 형벌앞에 서게 될때,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더러움보다는 본능적으로 죄에 대한 형벌에 시선을 두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대다수의 회개한다는 자들은 자신의 죄가 더러운것을 깨달아서 회개한다기보다는 죄에 대한 형벌때문에 뉘우치는 척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재앙앞에 바로는 여러번 회개하는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재앙이 걷혀지면 언제나 그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폭력때문에 두려워하는것은 상대를 존경해서가 아닙니다.

​형벌때문에만 회개하는것은 죄를 뉘우치는것이 아닙니다.

​​

회개가 죄에 대한 어떤 속량(贖良)이 되거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이 되는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그렇지만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함이 없이는 죄 사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

(웨스트민스터15 생명에 이르는 회개)

회개를 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경배와 예배, 사랑과 순종을 받아 마땅하시기 때문이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옥 가는 길을 피해 천국에 가려고 회개 한다면 당신은 10세겔과 옷 한 벌을 벌기 위해 섬기는 레위인입니다.

(패리스 라이드헤드)​(10세겔과 옷한벌)

중생하지 못한 자가 죄를 지을 때 그것은 범죄요(행벌)이 그의 생각을 온통 점령한다.

그러나 중생한 자가 죄를 지으면 그의 심령은 대부분 더럽히는 영향을 받는(defiling effects)것이다.

(제7장 성화론의 문제해결(2) / 아더 핑크)

형벌의 두려움때문에 회개하는 사람과 죄의 부패함때문에 회개하는 사람은

자칫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전자나 후자나 넘어지는 반복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회개의 동기는 명백히 차이가 있습니다.

돼지의 울부짖음을 들어보셨습니까?

도살장에서 들을수있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진흙탕속에선 울부짖지않습니다.

돼지는 진흙탕이 더럽다는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사람의 속깊이 숨긴 죄를 보여줍니다

죄는 형벌과 죄로 인한 오염, 부패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어떤이의 눈에는 형벌만 보이고

죄의 부패는 못본다는게 현실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빛이 절반만 비쳐서일까요?

그러므로,

거듭난신자의 회개의 동기는 형벌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죄의 부패함으로 인해서여야 하며, 이때문에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야하는것입니다.

다시 질문해봅니다

구원파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혹자는 미래의 죄벌까지 용서되었다는 그들의 확신이 오늘날의 구원파의 방종을 낳았다고 주장합니다. 상당히 반박하기 어려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점만 지적하는것은 절반의 정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진정 필요한 해답은 하나님의 빛앞에 죄를 바라보는 양심의 각성

이 아닐까요

앞서 이사라의 모습과 구원파의 문제점은 묘하게 중복되어보입니다.

형벌때문에 회개 하는 사람은 형벌이 없으면 회개할 동기가 사라집니다

형벌때문에 회개하는사람과 형벌이 없으면 회개할 동기를 못느끼는 사람은 같은 족속에 불과합니다.그들의 회개의 동기는 온통 형벌! 형벌!그것만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형벌이 없으니 회개의 동기를 못느끼는 그러한 사람에게 다시 회개할 동기를 부여하기위해서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다시 또 주섬주섬 되돌아가서 형벌때문에 회개하는 사람이 되야 할까요? 그냥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것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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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기독교의 진리는

무법주의 방종의 무리와 율법주의위선자 무리사이에서 양쪽의 공격을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회개의 동기에 대해서

어떤 무리들은 모든 죄벌들이 이미 용서되었으므로 더이상 회개할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무리들도 있고,

회개의 동기에 대해서

율법주의적인 주장으로 자신들도 사실상 지키지못하는 불가능한 주장을 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양극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균형잡힌 신앙을 지켜야 할것입니다.

회개는 쉬워요 백번도 넘게 해봤어요 나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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